아름다운 블로그를 만들기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아름다운 블로그를 만들자. 올해의 첫머리에 한 결심입니다. 웹 프론트엔드 개발자라면 한 번쯤 꿈 꿀, 그렇지만 막상 시작하고자 하니 막막한 주제지요. 저는 이 프로젝트를 한참이나 미뤄왔습니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그린 블로그의 스케치는 너덜한 잔상이 되었고, 이것저것 설치만 해둔 레포지토리가 몇 개는 되었죠. 작업을 시작하고 나서도 진도는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커밋을 남기기 위해 코드를 몇 번씩 갈아 엎고, 프로젝트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작업을 피했습니다. 그렇게 프로젝트의 첫 걸음은 일 년을 끌게 되었습니다.

이제 올해가 열흘도 남지 않았고, 저는 마침내 블로그를 출시하고자 합니다. 아무리 추한 것도 아름답다고 우길 때가 된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적기에 앞서, 이 프로젝트의 목표에 대해 다시금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이 마음 저무는 날까지 푸른 낭만을 선물할게, 초라한 나를 꺾어가요

이 벅찬 봄날이 시들 때 한 번만 나를 돌아봐요

- 한로로, 입춘

‘아름다움’의 디자인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용어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디자인과 예술은 어떻게 다를까요? 여러가지 구분법이 있겠지만, 가장 간단한 방법은 둘의 목적을 비교하는 겁니다. 디자인은 흔히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나가는 활동으로 여겨집니다. 일상의 불편함, 소통의 단절, 사회적 불평등, 또는 업무의 구조적 비효율과 같은 구체적인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 방법을 고안하는 모든 과정이 바로 디자인이죠. 그렇기에 디자인은 그 문제를 얼마나 잘 해결했느냐를 기준으로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예술은 좀 다릅니다. 예술의 목적도 넓게 보면 일종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은 디자인보다 훨씬 보편적이고 추상적이죠. 예술의 목적은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의 특징 때문인지, 유용함이나 효율성 등을 기준으로 예술을 정량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꽤나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예술이 아닌 지 판가름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이죠.

예술을 하는 것과 디자인을 하는 것은 이처럼 비슷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절의 제목을 지을 때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에 인용 부호를 두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목표하는 것은 예술 뿐 아니라 디자인의 관점에서 아름다움을 다루는 것입니다. 따옴표 안의 단어가 하필 ‘아름다움’인 탓에, 저의 짧은 식견이 여실히 드러나는 이 뜬구름 잡는 설명을 조금 더 이어가겠습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백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누구나 답해볼 수 있지만, 누구와도 합의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물며 가장 아름다운 블로그라니. 어떤 결과물을 산출하든 참 오만하다는 점 외에 여러분의 공감을 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본격적인 프로젝트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는 이 프로젝트가 단순히 자기만족, 내지는 자기표현으로 끝나지 않을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보았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아름다움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을 시도할 필요가 있겠죠. 여러분들이 보다 동의하기 쉬울 문장을 아래에 적어보겠습니다.

"아름답기는 쉽지 않다"

예술가들이 본인의 작품을 부수거나 버리고, 고된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겁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지 못해 포기했다는 이야기나, 아름다움을 위해 일상 생활을 포기하고 작업에만 매진했다는 이야기도요. 아름답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과 뛰어난 능력, 그리고 충분한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아름다움을 생산할 수 있는 조건에는 합의할 수 있는 정답이 있다.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구현하는 것은 예술이 아닌 디자인의 영역일 수 있습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다를지라도, 그 생각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환경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지 않을 지도 모르죠.

블로그 프로젝트의 목표

블로그는 기본적으로 글입니다. 이미지나 소리, 영상도 가끔 들어가고요. 아름다운 글을 쓰는 데에는 개인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 글을 자신이 상상한 대로 늘어놓고 편집하고 게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좋은 블로그 플랫폼이 할 일입니다. 나아가 어떤 환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아름다운 글을 쓰게끔 좋은 영감과 소재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아름답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끔 사람들을 자극할 수도 있고요. 그런 플랫폼은, 내용물의 아름다움을 차치하고도 ‘아름다움’이 잘 디자인된 플랫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블로그의 목표는 두 단계로 나뉩니다.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 플랫폼을 구현하고, 거기에 아름다운 글을 적는 것. 후자는 저의 개인적인 만족에 불과할 지라도, 전자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공감할 수 있을만한 결과물을 가져올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글 중간 중간에 인용한 문구들은 제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책과 노래의 글귀들입니다. 저는 이처럼 아름다운 글을 지금껏 동경해왔지만 아직 쓰지 못합니다. 앞으로도 어렵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만큼이나 아름다운 블로그, 플랫폼, 생산 조건, 아니 몇 줄의 코드를 적어볼 요량으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언젠가는 달성할 생각입니다.